이 글 끝에 제가 하는 것 한 줄이 붙어 있습니다. 그 앞은 도구 없이 A4 한 장으로 되는 얘기예요.
지난달 챌린지에서 한 원장님이 이런 후기를 쓰셨습니다.
매일 모든 수업의 모든 학생 피드백을 직접 한 명 한 명 쓰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요. 하루에 60명을 수업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 이미 AI를 쓰고 계셨어요.
그게 저는 계속 걸렸습니다. 남들 다 좋다는 걸 이미 쓰고 계셨는데 왜 그대로 잠을 못 주무셨을까. 본인이 못 쓰신 건가 싶어서 물어봤는데 아니었어요. 잘 쓰고 계셨습니다. 입력하는 시간은 실제로 줄었대요.
줄었는데 왜 안 편해졌냐면, 줄어든 게 원래 안 힘들던 쪽이었거든요.
AI가 못 가져간 자리가 따로 있습니다
이 얘기를 하려면 아홉 칸 글에서 썼던 세 단계를 잠깐 빌려와야 합니다.
학원 일은 뭘 하든 세 단계를 지납니다. 숫자로 세고(관찰), 규칙을 정해 밖에 말하고(약속), 그 증거가 실제로 나갑니다(실행). 커리큘럼도 시스템도 마케팅도 전부 이 세 겹을 통과해야 굴러가요.
그래서 요즘 자동화된다는 것들을 이 세 칸 위에 하나씩 올려봤습니다. 원장님들이 실제로 쓰고 계신 것들로요.

양 끝은 거의 다 넘어갔더라고요. 성적을 모으고, 출석을 세고, 문의 건수를 세는 건 이제 사람이 안 해도 됩니다. 보고서를 만들어 보내고 알림을 띄우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글 초안이나 카드뉴스도 몇 분이면 나옵니다.
그런데 가운데는 하나도 안 넘어갔습니다.
이게 이상하죠.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가운데 칸이 뭔지 보면 이해가 되실 거예요.
약속에는 세 조각이 들어갑니다
약속을 쓸 땐 세 가지가 들어가야 합니다. 무엇을, 얼마나 자주, 누가.
"학습보고서를, 주 1회 금요일에, 담임 선생님이."
이 셋을 기계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될까요. 답이 안 나옵니다. 주 1회가 맞는지 격주가 맞는지는 우리 학원 강사 수와 반 개수에 달린 거고, 담임이 쓸지 원장이 쓸지는 그 선생님이 프리랜서인지 아닌지에 달린 겁니다. 기계가 알 수 없는 것들이에요. 알 수 없는데 단정하면 그게 더 무섭고요.
그래서 이 칸은 안 넘어갑니다. 기술이 더 좋아져도 안 넘어갈 거예요. 정답이 학원마다 다르니까요.
그리고 여기가 진짜 문제인데, 약속 칸이 비어 있으면 양 끝이 자동화돼 있어도 안 굴러갑니다. 아홉 칸의 규칙이 그거였죠. 왼쪽이 비면 오른쪽이 안 채워진다.
숫자는 매일 세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 숫자를 보고 뭘 할지가 안 정해져 있으면 그냥 쌓이기만 합니다. 보고서도 자동으로 나갈 수 있어요. 그런데 뭘 써야 하는지가 안 정해져 있으면 "오늘 잘함"이 자동으로 나갑니다.
기준이 없으면 사람도 지어내고 기계도 지어냅니다. 빈칸을 주면 빈칸을 채우려고 뭐라도 쓰거든요. (양식을 주는 것과 기준을 주는 건 다른 일입니다. 이 얘기는 지난 글에서 길게 했어요.)
60명 원장님이 붙잡고 계셨던 게 딱 그 자리였습니다. 입력이 아니라 판단이요. 그건 AI가 가져갈 수 있는 칸이 아니었어요.
중요한 일일수록 오른쪽에 모입니다
이걸 알고 나서 학원 일을 쭉 늘어놓고 다시 나눠봤습니다. 그랬더니 좀 얄궂은 게 보이더라고요.
중요한 일일수록 자동화가 안 됩니다.
제가 원장님들 만나서 "이건 진짜 중요해요" 하고 말씀드리는 것들이 있어요. 반을 어떻게 구성할지. 레벨을 몇 개로 나누고 승급 기준을 뭘로 할지. 시험 끝나고 아이 만나서 얘기 들어보는 거. 이 셋이 제가 제일 자주 하는 말인데, 셋 다 안 넘어갑니다.
반대로 "그거 생각보다 안 중요해요" 하는 것들 — 카드뉴스 예쁘게 다듬기, 문의에 즉각 답장하기 — 이런 건 이미 기계가 합니다.
그러니까 "AI 쓰면 편해져요"가 잘 안 와닿는 게 당연했어요. 편해지는 쪽은 원래 별로 안 힘들었던 쪽이거든요.
한 가지만 덧붙이면, 관찰 칸 안에서도 한 번 더 갈립니다. 숫자로 세지는 관찰은 넘어가는데 사람 말을 듣는 관찰은 안 넘어가요. 시험 끝나고 아이한테 "요즘 어때" 물어보는 거, 그건 아무도 대신 못 합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 학원 불만을 1차 고객한테 직접 듣는 거의 유일한 기회예요.
A4 한 장으로 나눠보세요
도구 없이 오늘 되는 게 하나 있습니다.
지금 원장님이 하고 계신 일을 쭉 적으세요. 그리고 두 칸으로 나누세요.

구분법은 간단합니다. 세거나 내보내는 일이면 왼쪽, 정하거나 듣는 일이면 오른쪽.
성적 모으기는 세는 거니까 왼쪽. 보고서 보내기는 내보내는 거니까 왼쪽. 반을 어떻게 짤지는 정하는 거니까 오른쪽. 아이 만나서 듣는 건 오른쪽.
애매한 게 나오면 이렇게 물어보세요. 이 일을 남한테 시키려면 내가 뭘 먼저 정해줘야 하나. 정해줄 게 있으면 그 정하는 일이 오른쪽이고, 시키는 일 자체는 왼쪽입니다.
적어보시면 아마 왼쪽이 훨씬 길 거예요. 그리고 지금 원장님 하루의 대부분이 왼쪽에 가 있을 겁니다. 그게 넘길 수 있는 건데도요.
정직하게 하나만
이렇게 나눈다고 오른쪽이 채워지는 건 아닙니다.
나누는 건 30분이면 되는데, 오른쪽 칸을 실제로 채우는 건 여전히 어려워요. 반을 어떻게 짜야 할지는 나눠놓고 봐도 여전히 모르겠고요. 저는 이걸 원장님 200분 넘게 옆에 앉아서 같이 했는데도 며칠씩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글은 "이렇게 하면 됩니다"가 아니라 "여기가 진짜 자리입니다"까지입니다. 그 이상은 솔직히 한 편으로 안 됩니다.
다만 나누는 것만으로도 하나는 분명해져요. 지금 붙잡고 있는 것 중에 안 붙잡아도 되는 게 뭔지가 보입니다. 그것만 해도 손이 좀 비어요.
오늘 하나만 해보신다면
오른쪽 칸에서 하나만 고르세요. 그리고 그걸 세 조각으로 적어보세요.
무엇을, 얼마나 자주, 누가.
예를 들어 "학습보고서를, 격주 금요일에, 담임 선생님이." 이렇게요. 셋 중 하나라도 비면 안 굴러갑니다. 특히 '누가'가 비면 결국 원장님이 하시게 돼요.
그리고 이걸 마음속으로만 정하면 결심이고, 선생님이랑 학부모한테 말하면 약속입니다. 결심은 3주를 못 가요. (저는 2주였습니다.)
오늘 얘기는 아홉 칸 중에 가운데 세로줄, 약속 열 하나였습니다.
이 줄이 비면 옆 칸들이 이상해집니다. 왼쪽 관찰 칸은 숫자만 쌓이고, 오른쪽 실행 칸은 자동으로 나가긴 하는데 알맹이가 없어요. 원장님이 자동화를 켜놓고도 "이게 되는 건가" 싶으셨다면, 십중팔구 가운데가 비어 있어서입니다.
거기는 아직 사람 자리입니다. 당분간은 계속 그럴 거고요.